2016. 11. 05
모모에서 요즘 네오리얼리즘 강의를 듣는데
어제 강의에서 이 영화를 빠른속도로 같이 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그것때문에
이 영화를 줄곧 봐야지 봐야지만 하다가 오늘에서야 봤다.
사실 보면서 든 생각은 역시 강의 전에 봐뒀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사실 원래 내용도 대충은 알고 있었고
마지막 부분은 이미 영예이 수업에서 다같이 봤긴 했지만
어제 강의를 듣는데
아예 영화를 빠른 속도로 돌리면서 대부분을 같이 보면서
선생님이 여러가지 포인트를 이야기하셔서
오늘 영화를 보는데 이미 다 본 느낌....?
그래서 영화를 보는데 생각보다 큰 감흥이 없었던것 같다.
강의 전에 봤으면 분명 더 좋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ㅜㅜ
어제 강의에서 나온 이야기 중 하나가
아이의 타락, 아이의 착취 라는 테마다.
영화내내 아이는 모두에게 착취를 당한다
그것이 노동이든 성적 대상으로든.
영화 초반에 에드문트가 자기 몸집만한 큰 가방을
메고 다니는것을 보면서 참 슬프더라.
집에 있는 아픈 아버지와 나치 병사로 싸웠던 형은
무기력하게 집에서만 지내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전부 에드문트와 그의 누나에게 넘길뿐이다.
그러면서 불만도 참 많고 비난도 참 잘 하더라.....ㅡㅡ
보면서 약간 근대한국문학에서의 남성들이 생각났다.....ㅎ
에드문트가 어쩌다 하룻밤을 밖에서 지내고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는 그의 뺨을 때리면서
타락한 아이라고 혼낸다
하지만 그 아이를 소위 "타락"하게 만든것은
결국 그 12,13살 밖에 안되는 아이를
돈을 벌고 가장의 역할을 떠넘기고 바깥 세계로 밀어내버린
아버지와 형 아닌가 싶어서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후반에 에드문트가 자신의 아버지를 독살하고
자신의 선생님을 찾아가서 인정받으려 하는 부분도 슬펐다
"아이"는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은 잘못을 해도 주변의 어른들
"애잖아"라는 말을 해주기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에드문트는 줄곧 자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아야 했으며
그나마 자신이 옆에서 '아이'로써 지낼수 있다고 생각한
선생님의 말을 따라 아버지를 독살하고
아이처럼 그에 대한 책임을 선생님에게 전가시키려하자
선생님은 에드문트에게 온갖 비난을 하며
그에게 책임을 묻는다.
아무도 그를 아이로서 대해주는 존재가 없다.
흥미로운것은 에드문트가 영화 처음으로
자기 가족에게 자신이 사실상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음을 육성으로 내뱉고나서야
그는 집을 떠나서 처음으로 아이로서 거리를 걷는다.
더 이상 자기 몸집만한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고
아이들이 놀던 분수에도 가보고
아이들이 공을 차고 노는 곳에도 참여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를 같이 놀도록 허락하지 않고
에드문트는 또 혼자서 방황을 한다.
'전후 독일' 이라는 세상에서는 그가 아이로서
존재할수 있는 곳은 아무곳도 없다;
그렇기에 에드문트는 결국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전쟁이 끝난 독일에 가서 찍었기에
다큐멘터리적 요소도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정말 어떻게 저기에 직접 가서
저곳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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